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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화랑 권기철 작가 초대전 “미술 목적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
동원화랑에서 초대전을 개막한 권기철 작가 작업의 바탕에는 허무주의가 깔린다. 그가 영화나 책을 선택하는 기준도 “허무주의를 주제로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일 정도로, 그는 허무주의 맹신자처럼 보인다. 그와 허무주의는 꽤 오랜 역사로 함께 했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9남매 사이에서 성장했다. 그의 형제자매는 무학이거나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고, 그만 홀로 중등 교육을 받았다. 그는 10대 중반에 이미 집으로부터 독립하여 홀로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저의 유년은 가난과 가족 구조 속의 고립으로 특징 지어 졌어요.” 외로움과 결핍은 그의 성장기를 지배했다. 결핍은 세상을 불화의 연속으로 체감하는 계기가 됐다. 불화는 조화롭지 못한 갈등상태를 의미한다. 그에게 반복되는 불화의 경험은 세계를 허무와 결핍의 장으로 바라보는 정서적 토대가 됐고, 대학 졸업 후 작업을 본격화며 작품이 불화를 해소·기록하는 장으로 기능했다. 인간세상에서 허무주의(虛無主義, nihilism)는 긍정과 부정의 의미로 전개된다. “아무것도 의미 있지 않다”라는 부정의 의미와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자양분”이라는 긍정적인 의미가 중첩된다. 권 작가에게 허무주의는 후자로 기능한다. 제게 허무주의는 단순한 체념이기보다 능동적인 서사로 작동했어요.”
그의 화풍은 두 가지로 전개된다. △먹으로 서예의 획을 변주하는 작업 △ 먹과 아크릴 물감의 혼용에 의한 칼라 작업 등이 그것이다. 그에게 먹 작업이 존재의 본질에 대한 심청적인 탐구라면, 칼라 작업은 일기와 같은 일상적 기록이다. 권기철의 칼라 작업은 다채로운 색채의 스펙트럼로 구축된다. 선이나 면, 숫자, 한글 자모, 이니셜 등을 기호화해 서사를 이끈다. 작품 마다 등장하는 과장된 몸짓의 노란 색은 결핍에 대한 그의 허무를 대변한다. “화면 위 화려한 색채는 숨겨진 질문의 흔적을 드러내며, 관람자를 연상과 사유의 세계로 안내하는 장치가 됩니다.”
칼라 작업에는 두 가지의 의도가 숨겨졌다. 첫째는 은폐와 포장이다. 아크릴 물감의 다양한 색들 속에 자신의 일상 속 불안한 감정이나 때로는 편치 않은 몸 상태까지 숨긴다. 둘째는 예술가와 생활인 사이의 균형 잡기다. 예술을 통해 최소한의 경제력을 확보해야 하는 것은 예술가의 과제이고, 그것은 삶과 예술을 이어가기 위한 선택이다. 그는 먹과 칼라 작업의 병행으로 조화로운 삶을 추구했다. 칼라 작업은 보다 대중적이어서 판매에 먹 작업보다는 용이했다. 현실과 조금의 타협은 허용했지만, 그는 ‘고통과 불안이 좋은 작품을 낳는다’는 믿음은 버리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도 고통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오래 남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림이 팔려야 삶이 유지된다는 현실적 생계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고 솔직히 말한다. “먹 작업은 큐레이터나 미술관에서 선호하는 그림이지만, 대중적이지 않아 판매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칼라 작업은 먹 업이 가지는 판매에서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선택이었어요.”
칼라 작업이 먹 작업을 위한 또 하나의 선택지였지만, 칼라 작업 속 개념이나 작업 과정까지 차선책인 것은 아니었다. 먹 작업 못지않은 내공이 스며있다는 의미다. 칼라 작업과 먹 작업의 동시적인 전개 이면에는 그가 미술을 하는 궁극의 이유가 있다. 먹과 한지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 지향이다. 칼라 작업은 먹 작업을 계속하기 위한 징검다리 같은 역할이 부여된다. 먹이든, 아크릴 작업이든, 그의 작업에는 결핍과 불화라는 개인사, 서예와 먹에 대한 전통적 수련,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라는 전통 철학 등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 작업의 출발은 서예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의 서예를 했고, 서예의 ‘선’과 ‘획’에 대한 민감성을 키웠다. 그의 작업은 일필휘지로 전개되는 ‘일(一)’이라는 단일 획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일 획의 확장으로 화면은 전체로 나아간다. 이런 방식은 화엄의 ‘일즉다·다즉일’ 개념과 연결된다. ‘하나와 전체의 비가역적 연속성’이라는 관점인데, ‘한 획’의 함축성은 불필요한 서사를 배제하고, 존재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려는데 방법론이었다. 이는 결국 허무적 정서를 미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그의 작업에서 언급해야 하는 또 하나는 몸의 역할이다. 그는 찰나의 붓질에 온 몸을 싣는다. 그에게 한 획의 강렬한 붓 터치는 몸으로 폭발하는 순간의 발산이자, 허무와 직면하는 방식이다. “‘우연으로 시작해 필연’으로 귀결하며 ‘추상’으로 나아가는 저의 일필휘지의 붓 터치는 말이 아닌 몸으로 정리하는 수행입니다.” 동원화랑 개인전 제목이 ‘의미없음 : 흩어진 질문’이다. 여기에서 작업을 대하는 그의 태도 변화를 감지한다. 그는 최근 3~4년 사이에 전시 제목이나 작품 제목을 붙이지 않는다. 제목에 대한 거부는 작품을 특정 서사에 묶지 않으려는 태도와 연결된다. “매일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강박이나 “‘그림에 심오한 의미를 이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던 이전까지의 태도와 대조된다. 60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비로소 강박과 절연할 수 있었다. “강박은 제 삶과 예술에 긍정과 부정이라는 상반된 영향을 미쳤지만 세월에 깎이면서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됐어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그림을 잠시 쉬는 공백의 시간도 수용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작업에 심오한 개념을 이입해야 한다”는 ’규범성‘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이는 결국 작가인 그와 감상자인 관람객 모두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림에 대한 강박은 저와 감상자 모두에게 자유를 주는 것 같아요. 저는 강박을 내려놓아 편하게 작업할 수 있고, 관람자에게는 해석의 여지를 넓히니까요.” 전시는 30일까지.
황인옥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