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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4 ⎢ Artist : 동원화랑⎢ 영남일보

봉산문화거리 동원화랑 손동환 회장·손의권 대표

예술가 감성 형과 경영자 이성 아우가 꾸리는 화랑…심미안도 경력도 최상급

급변하는 세상에서 새로움이 우선 가치를 가지지만 오래된 것이 주는 가치도 절대 만만치 않다. 오래됨은 익숙함, 나아가 편안함이다. 긴장된 일상에서 편안함은 마음의 평화를 찾아주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활력을 준다. 40년 가까이 대구 중구 봉산문화거리를 지키고 있는 동원화랑은 짧지 않은 역사가 주는 신뢰와 편안함을 가진 곳이다. 최근 카페·공방 등이 둥지를 틀면서 봉산문화거리에도 새바람이 일고 있지만,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대구 최고의 화랑 골목을 꿋꿋이 지키고 있다. 그런데도 세월은 변화를 비껴가지 못했다. 최근 동원화랑의 운영체제가 바뀌었다. 손동환(67) 대표가 회장, 그의 동생인 손의권(61) 기획실장이 대표가 됐다. 화랑의 실질적 운영 주체가 바뀐 것이다.
 

형과 동생의 특이한 승계 봉산문화거리 화랑 대부분
폐업하거나 자식이 잇지만 손동환 회장은 동생에 넘겨
"작은 화랑 대표직 물려주고 회장 됐다면 남들이 웃을 일"
 

1970년대 중반 대구백화점과 동아양봉원 사이에 화랑이 하나둘 들어선 데 이어 봉산동에도 화랑 골목이 생겼다. 바로 봉산문화거리다. 이곳에 둥지를 튼 첫 화랑이 동원화랑이다. 40여 년 부침의 세월 속에서 문을 닫거나 대표가 바뀐 화랑들이 늘어갔다. 몇몇 화랑들은 2세에게 가업을 물려줬다. 하지만 현재까지 동생에게 대표 자리를 넘긴 화랑은 없었다. 수족지애(手足之愛), 여족여수(如足如手)라 하며 형제간의 우애를 귀히 여겼지만 각박해져 가는 요즘, 이 모습은 점점 귀해졌다. 동원화랑에 더 믿음이 가는 이유다.
 

이 때문에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손 회장은 거절했다. "동생과 오랫동안 함께 일했으니 당연히 대표를 맡겨야 한다. 이게 무슨 취잿거리가 되느냐"는 것이다. 3번을 거듭 요청하자 동생과 상의한 뒤 결정하겠다고 했다. 어렵게 이뤄진 인터뷰에서 손 회장은 말을 아꼈다. 동생도 형을 닮았는지 과묵했다. 먼저 손 회장이 "조그만 화랑에서 대표 물려주고 회장 됐다는 것은 남들 보면 웃을 일"이라는 말로 운을 뗐다. 하지만 가나아트, 갤러리현대, 국제갤러리 등 한국을 대표하는 화랑은 이미 오래전부터 회장과 대표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고(故) 김태수 맥향화랑 대표, 대구미술관에 수백 점의 작품을 기증한 컬렉터 김인한씨 등이 회장·대표체제로 가야 한다고 권유했다. 그래도 주위에서 회장이라고 부르니 듣기에 민망하다. 막을 수도 없고. 과거에 대구화랑협회, 봉산문화협회 회장 등을 했으니 그리 부른다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가 대구 화단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회장이란 직함이 절대 넘치지 않는다.
 

손 회장은 1982년 동원화랑을 오픈했다. 맥향화랑, 송아당에 이어 3번째였다. 현재 맥향화랑은 2세가 운영하고 송아당은 문을 닫았다. 동원화랑은 대구지역에서 창업주가 운영하는 가장 오래된 화랑이다. 그는 이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 세월 버텨왔기 때문이다.

"동생이 대표를 맡은 건 최근이지만 몇 년 전부터 실질적 운영을 했다. 동생도 화랑업계에 뛰어든 지 30년이 됐다. 화랑을 이끌 역량은 충분하다. 몇 년 전부터 맡기려 했지만 동생이 부담스럽다며 만류했다. 더 미룰 순 없었다."

이 말에 손 대표는 오히려 형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형님 덕분에 화랑 운영이라는 매력적인 일을 하게 됐다. 좋은 직업을 갖게 해준 것도 고마운데 대표까지 맡으라 하니…." 그는 그 자리가 좋기보다는 부담스럽다고 했다. 아직 형의 지극한 예술 사랑을 따라가지 못한다고도 했다.
 

동생 말처럼 형의 미술 사랑은 지역 화단에 널리 알려져 있다. 오죽했으면 손 회장을 두고 화상이 아니라 예술인이라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까. 누군가는 그를 1900년대 초반 프랑스 파리 화단을 이끈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와 비교하기도 한다. 볼라르는 미술품에 뛰어난 안목을 가진 화상으로 인상파 화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세잔, 고갱, 르누아르 등과 교류하며 이들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작가와의 교류를 엮은 자서전 '어느 화상의 회고록'도 펴냈다. 손 회장 역시 작가와의 교류를 작품 못지않게 중요시한다. 작품을 컬렉터에게 파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작가와 대폿잔 맞대고 인생 이야기를 나누면서 작가와 작품을 함께 이해해 나간다.
 

"보통 작가와 작품은 닮았다. 작가가 좋으면 작품도 좋다. 화랑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좋은 작가와 인연을 쌓고 그들의 작품을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다. 먼저 내가 즐겁고 작가·컬렉터에게도 기쁨을 안겨줄 수 있다. 좋은 작품을 사가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작품 판 돈으로 물감 사서 작업하는 작가를 보는 것도 즐겁다."


예술가와 경영자의 조합 
1980년대부터 창업주 운영
대구지역 가장 오래된 화랑 최근엔 동생이 실질적 경영
"작가와 예술적 교류하는 일 동생이 탄탄히 받쳐준 덕분"


손 회장이 미술에 푹 빠져든 것은 그림 한 점 때문이었다. 미술전문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알게 된 화가가 준 그림 선물이 그의 인생을 바꿔놨다. 세 들어 살던 작은 집에 걸어놓은 그림은 그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놨다. 이후 시간만 나면 그림을 사러 다녔다. 어느 날 봉산동 액자 집에 들렀다가 부근에 '가게 세 놓는다'는 전단을 보곤 덜컥 가게를 얻었다. 그게 화랑 운영의 시작이다. 그의 호였던 '동원(東園)'을 가게 이름으로 붙였다. 화랑은 그림을 파는 곳인데 손 회장은 그림 사는 일이 더 좋았다. 좋은 그림을 살 때는 가슴이 설레었고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팔 때는 농부가 상답(上畓) 파는 것처럼 가슴이 시렸다. 아끼던 동생을 화랑에 불러들인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맏이였던 형님이 어느 날 화랑에 나와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수년간 화랑을 출입했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애정은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그림이 돈으로 거래되는 것을 보고는 신기했다. (화랑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전만 해도 그림을 팔고 사는 개념이 없었다. 선물이나 술 한 잔 사주고 얻는 경우가 많았다)그런데 어느 날 그림의 가치를 깨닫게 됐다. 그즈음 형님의 요청이 왔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형님 밑으로 들어왔다."
 

그게 1990년이었다. 동원화랑이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형의 부름으로 화랑업계에 몸담았지만, 천직처럼 손 대표의 적성에 맞았다. 좋은 그림을 찾아내고 이를 귀한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에게 판매하는 즐거움이 컸다. 게다가 인생 선배들에게 삶을 배우는 기회도 얻었다. 컬렉터 상당수는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다. 작품을 매개체로 그들과 교류하면서 삶의 지혜도 배웠다.


"작품 보는 안목이나 작가와의 교류에서는 형님보다 한 수 아래다. 아무리 배우려 해도 안 되는 게 있다. 그림이 좋아 작가와 한 몸 되듯 어울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장점이 있었다.

화랑은 일반 물건을 파는 가게와는 다르다. 예술작품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감성이 필요하지만, 화랑 운영이라는 측면에서는 이성적 판단도 중요하다. 감성과 이성의 균형을 잘 유지해야 좋은 화랑이 될 수 있다. 예술가 못지않게 감성적인 형의 부족함을 이성적인 동생이 채워줬다. 형은 이런 점에서 동생을 신뢰한다.

"작가와 마음껏 어울리면서 화랑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경영을 탄탄히 받쳐준 동생 덕분이었다. 동생이 없었다면 이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동생의 다른 기질이 화랑 운영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작품과 신뢰를 다루는 화랑 
안목 덕분에 위작 염려 없고 
400회 가까운 전시회 경력도 투자위주로 흐르는 미술시장
자본이 좌우하는 현실 아쉬워 화랑-작가-수집가 聯도 끊겨


화랑은 작품과 신뢰를 동시에 판매하는 곳이다. 그 당시만 해도 위작이 많았다. 동원화랑에서 사면 이런 위험이 없었다. 그만큼 동원화랑의 안목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심미안도 탁월했다. 몇 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들이 소장품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작품 3점을 뽑았다. 여기서 동원화랑이 국립현대미술관에 판매한 서양화가 진환의 작품 '혈'이 뽑혔다. 동원화랑이 가진 안목, 여기서 나온 신뢰가 현재까지 버틸 수 있는 자양분이 됐다. 400회 가까운 기획전·초대전 또한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전시경력이다.